1. 마라도나의 유년기
1960년 10월 30일, 부에노스 아이레스 주 라누스의 과라니족과 스페인 바스크계 혈통의 아버지 디에고 마라도나 치토로, 그리고 이탈리아계와 크로아티아계 혈통의 어머니 달마 살바도라 프랑코 사이에서 태어난 마라도나는 3남 5녀 중 다섯째이자 장남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축구공을 선물 받은 3살 때부터 축구에 빠져, 어린 마라도나는 그 공을 끌어안고 다닌 적도 있을 정도로 축구에 대한 열정을 보였다고 합니다. 가난과 위험으로 가득한 환경에서 태어나, 아버지 돈 디에고는 선원으로 살며 돈을 벌기 위해 가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극북동 지역에서 벗어나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판자촌 비야 피오리토로 이주했는데, 그 지역은 너무나 폭력적이고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가난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마라도나의 부모는 어려운 가정을 위해 힘쓰고, 마라도나는 자신이 무엇이든 해야 한다고 결심했습니다. 마라도나는 축구에서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8살 때 지역 클럽인 에스트레야 로하에 입단했습니다. 로스 세볼리타스에서는 무패의 기록을 세우며 마라도나가 주축이 되었습니다. 이후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의 유소년팀으로 입단하면서 그의 축구 재능은 확실히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는 마라도나에게 작은 아파트를 선물하며 그를 지원했고, 마라도나는 가족을 위해 축구로 성공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마라도나는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에서 큰 주목을 받고 역대 최고의 축구 선수 중 하나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시작된 마라도나의 축구 경력은 그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끝없이 열정을 지킨 특별한 이야기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2. 마라도나의 평가
1980년대는 축구의 황금 시대로, 10번 공격형 미드필더와 플레이메이커들이 풍부했습니다. 마라도나는 그 시기 수많은 뛰어난 플레이메이커 중에서도 두드러진 일인자로 떠올랐습니다. 라우드루프, 발데라마, 하지, 뮐러, 쾰레만스, 로메로, 시포, 지레스, 브래디, 루메니게, 플라티니, 프란체스콜리, 굴리트 등과 비교하여도, 마라도나는 그의 뛰어난 기량으로 의심의 여지없이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특히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의 업적은 마라도나를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떠오르게 했습니다. 그 해 아르헨티나를 월드컵 우승으로 이끌며, "축구는 11명이 하는 팀 스포츠"라는 관념을 뛰어넘는 최초의 선수로 극찬받았습니다. 이는 펠레, 메시와 함께 최고의 선수로 꼽히게 된 이유 중 하나입니다. 마라도나는 18세에 바르셀로나의 스카우트에게 이미 축구의 신으로 평가받았고, 나폴리에서는 주장으로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이때의 성과는 단순한 팀 우승을 넘어, 그의 도시와 국가를 위상을 바꾸며 축구 본연의 위대함을 실현했습니다. 이탈리아의 감독 사키는 마라도나를 견제하기 위해 개인이 아닌 구조의 정형화된 압박 수비 전술을 고안했습니다. 이는 현대 축구의 근간을 이루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마라도나는 이에 고전하지 않고, 압박 축구에도 무력으로 승부하여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라도나는 동료들을 이끄는 탁월한 리더십을 가졌습니다. 18세에 주장으로 선정된 경험, 나폴리를 강등에서 구해낸 힘은 그의 리더십을 입증하는 사례로 꼽힙니다. 팀을 이끄는 주장으로서 개인 능력과 팀원들의 역량을 결합시키며 항상 경기에 관여했습니다. 마라도나는 스포츠 선수를 넘어 국가와 도시의 상징으로 떠올랐습니다. 아르헨티나와 나폴리의 어려운 시기에 축구를 통해 위상을 높였으며, 이는 단순한 축구 선수나 스포츠 영웅을 넘어 역사적 아이콘으로 기억되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3. 마라도나의 라이벌
마라도나는 크루이프, 호나우두, 메시와 같이 동시대에 더불어 꼽히는 뛰어난 선수들과는 다르게 라이벌로서의 대상이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요 라이벌로 꼽힌 선수 중에서 로타어 마테우스가 그 중 가장 큰 경쟁자로 자리 잡았습니다. 루메니게, 플라티니, 지쿠와 같은 선수들은 마라도나와 전성기가 겹치지 않아 완전한 라이벌로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미 1980년대 초반에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었을 때, 마라도나는 아직 20대 초반이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반 바스텐, 굴리트, 마테우스는 동시대이지만 센터포워드로서의 역할과 포지션이 다르기 때문에 직접적인 라이벌로서의 비교는 적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굴리트와 마테우스는 라이벌로 논의되었으며, 특히 마테우스는 마라도나와 나이가 비슷하며 2번의 월드컵 결승과 세리에에서의 우승 경험이 있어 가장 적합한 라이벌로 여겨졌습니다. 1979년부터 1988년까지의 마라도나의 전성기 동안 마테우스는 그의 퍼포먼스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이후 마테우스는 마라도나와의 경기에서 승리를 거둬 1990 이탈리아 월드컵 결승에서도 마라도나를 이기며 29세에 세계 최고 선수로 꼽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쟁과 마라도나의 마약 스캔들로 인한 몰락은 그의 커리어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었습니다. 마라도나의 퇴장 후에도 마테우스는 높은 실력과 성과를 유지하며, 그의 성장은 마라도나와의 라이벌 관계를 더욱 강조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