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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구의 역사, 중국의 탁구, 한국의 탁구

by 마음의 집중 2024.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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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탁구의 역사

탁구의 기원은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없지만,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등에서 관련된 역사가 있으며, 특히 영국의 식민지인 인도에서 살던 영국인들이 더운 기후에서 실내에서 즐길 수 있는 테니스 형태의 놀이를 찾다가, 1890년에 데이비드 포스터가 고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은 간이 테니스 형태의 놀이를 위해 탁자에 그물을 두르고 주변에 나무 울타리를 설치한 원초적인 형태의 탁구 게임에 대한 특허를 출원했습니다. 원래 탁구는 코르크나 고무에 천을 덧대어 만든 공을 사용했지만, 이 공은 탄성이 강하고 무거워서 작은 탁자 위에서 경기하기 어려웠습니다. 1900년대에는 가벼운 셀룰로이드 소재의 탁구공이 개발되면서 탁구는 급격한 인기를 얻었고, 1988 서울 올림픽에서는 올림픽 종목으로 추가되었습니다. 한반도에서는 1910년대에 일본을 통해 탁구가 소개되었고, 1928년에는 전조 선 탁구 선수권 대회가 개최되기도 했습니다. 첫 대회에 출전한 유남규가 올림픽 사상 최초의 탁구 금메달리스트가 되었고, 은메달은 김기택이 획득했습니다. 이때 사용된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종합체육관은 세계 최초의 올림픽 탁구장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패럴림픽에서는 1960년 로마 패럴림픽에서 휠체어 탁구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고, 1976년 토론토 패럴림픽에서는 입식 종목이 추가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최초 패럴림픽 금메달은 1972 하이델베르크 패럴림픽에서 휠체어 탁구 2관왕 송신남이 차지한 것으로, 이는 올림픽 금메달을 딴 양정모보다도 빨랐습니다. 야외 스포츠인 테니스를 실내에서 간단하게 즐길 수 있도록 만든 탁구는 '테이블 테니스'로도 불리며, 한자어 '탁구(卓球)'는 이것의 번역명입니다. 또한 '핑퐁'이라는 의성어에서 유래한 이름인 '핑퐁 외교'는 1970년대 미국 탁구 선수단이 중국을 방문하여 관계 개선의 계기로 삼은 냉전 완화의 사례를 가리키게 되었습니다. 이후 '핑퐁 외교'는 '정치적 대립이나 갈등이 있는 국가 간에 부담이 적은 방식으로 소통하여 관계를 개선하는 일'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2. 중국의 탁구

탁구는 중국에서는 우슈나 쿵푸와 같은 전통 무술을 재외하면 국민 스포츠로 취급되어 중국의 국기로 여겨집니다. 마오쩌둥의 홍 군이 대장정 중에도 탁구를 즐겼다는 일화가 전해지며, 1952년 국가대표 탁구팀 창단 이후 탁구를 전 인민들에게 보급하기 위한 정책이 실시되었습니다. 중국 체육당국은 독자적인 용구와 기술을 개발하여 탁구 국가화를 촉진하였고, 약 10억 인구를 보유한 중국에서는 탁구가 생활 체육으로 널리 보급되어 압도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중국 탁구 선수들은 이러한 열풍에 힘입어 세계에서 월등히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고 있으며, 탁구 마녀로 불리는 덩야핑이 132회나 우승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중국은 올림픽 여자 단식에서 1988년 서울 올림픽부터 9회 연속으로 정상을 지키며 기록을 세우고 있습니다. 또한 남자 복식-단체와 여자 복식-단체에서도 8회 연속 금메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탁구 인프라는 국제 대회에서 뿐만 아니라 생활 체육으로서도 매우 탄탄하며, 중국 내 등록 선수는 2,000만에서 3,000만 명에 이릅니다. 중국의 공원에는 어디에나 탁구대가 설치되어 있어 중국인들은 공원에서 쉽게 탁구를 즐길 수 있습니다. 또한, 중국에서는 탁구가 교류와 친목의 수단으로 인식되어 길거리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쉽게 탁구를 즐기는 풍경이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올림픽에서는 국가별로 출전 인원 제한이 있어 중국은 이를 준수하며 경쟁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 내에서는 탁구 국가대표가 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여 능력이 출중한 선수라도 국가대표에 발탁되지 못한 경우, 다른 국가로 귀화하여 활동하는 사례가 있습니다. 이로 인해 국제 탁구 대회에서는 중국계 귀화 선수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의 탁구 국가대표는 경쟁이 치열하여 안정적인 스텝과 뛰어난 수비 능력이 필수적이며, 이로써 중국 선수들이 국제 대회에서 높은 실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여자 단식에서는 중국 선수들의 압도적인 강세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3. 한국의 탁구

한국은 동양권에서 중국, 일본, 홍콩, 대만과 함께 탁구 강국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유남규, 김택수, 현정화, 유승민과 같은 유명 탁구 선수들을 배출하였으며, 중국 귀화 선수들인 당예서, 곽방방, 석하정, 전지희 등도 많이 나와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부터 2020년 도쿄 올림픽까지의 탁구 금메달 순위에서 한국은 2위를 차지하여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특히 88 서울 올림픽에서는 남자 단식 결승전이 한국 선수들 간의 내전으로 이루어져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2008 베이징 올림픽 이전에는 대한탁구협회의 내분이 있었지만, 새로운 회장의 취임으로 회복되어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단체전 남녀동반 동메달을 획득하였습니다. 2012 런던 올림픽에서는 남자 단체전에서 은메달을 획득하고, 여자 단체전에서는 싱가포르에게 동메달을 내주었습니다. 2014년에는 9살 어린 신유빈이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주목을 받았고,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에서는 국가대표로 뽑혀 성과를 내었습니다. 유승민, 오상은, 주세혁 등 올드보이 3인방은 오랜 시간 동안 탁구에서 분투한 흔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세대교체가 진행되면서 새로운 선수들이 부족한 실정이며, 특히 여자 부문에서는 2004년 이후 메이저 대회에서의 메달 부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는 한국이 남녀 탁구에서 처음으로 메달 획득이 없는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2017년 세계선수권에서 이상수가 단식 동메달을 획득하고, 2018년 코리아 오픈에서 장우진이 3관왕에 올라 희망의 불씨를 보였습니다. 전반적으로 세대차이와 함께 한국 탁구는 침체기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녀 모두에서는 복식 부문에서 어느 정도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패럴림픽에서는 탁구가 한국에게 큰 효과를 가져오며 금메달을 수차례 획득하고 있습니다. 이는 패럴림픽에서는 중국과 함께 최강국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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